다양한 맛과 표정을 가진 후추

다양한 맛과 표정을 가진 후추의 세계

멘토 | 장준우

에디터 | 차승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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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재료를 이해해야 하는 이유의 스핀오프 콘텐츠 입니다.

• 독특한 향과 강한 맛으로, 쉽게 활용하지 못했던 후추
• 후추의 종류를 흑후추와 적후추만 알았던 푸드메이커라면
• 후추의 다양한 종류와 특징에 집중하며 이 글을 읽어주세요

언젠가 캄보디아 현지에서 날아온, 작은 후추 한 봉지를 만난적이 있습니다. 흔히 보는 후추와는 달리 갈색빛이 도는 통후추였죠. 호기심에 갈아서 한 꼬집 맛보니 웬걸, 보통 후추의 맛과 달리 상쾌한 과일향이 나면서도 알싸하고 매콤한 맛이 차례로 휘몰아쳤습니다. 마치 잠시 다른 세계에 있다가 온 기분이었어요!

후추, 어디서 어떤 맛이 만들어질까?


후추의 최대 생산국은 어디일까요? 콜럼버스가 그렇게 인도를 찾아 서쪽으로 항해를 한 걸로 보아 인도일 것 같지만 사실 인도는 인도네시아에 이어 후추 생산량 3위라고 합니다. 최대 후추 생산국은 베트남으로, 전 세계 후추 3분의1이 생산됩니다. 우리가 흔히 접하는 후추 대부분이 베트남산이죠.

후추도 농산물이다 보니 지역과 가공법에 따라 품질의 차이가 존재합니다. 잘 알려진 고급 후추는 캄보디아의 캄포트 후추입니다. 캄보디아 프놈펜의 서남쪽에 위치한 캄포트 지역은 고품질의 후추를 키우기 적합하죠. 지인이 선물해 준 놀라운 풍미의 후추가 바로 캄포트 후추였어요.

13세기부터 후추를 재배해 온 캄보디아는 20세기 주요 후추 생산국이었지만 내전으로 인해 생산량이 곤두박질쳤습니다. 캄포트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후추가 생산되지만 여전히 캄포트산 후추를 최고로 치죠.

베트남의 고품질 후추로는 캄보디아 캄포트 지역과 인접한 푸꾸옥섬에서 나는 후추가 손꼽힙니다. 캄포트 후추처럼 과일향이나 꽃향기가 처음에 느껴지다가 서서히 찾아오는 매운맛으로 인기가 높죠.

인도에선 텔리체리 후추가 유명합니다. 인도 남부 케랄라 지방에 텔리체리라고 불렸던 지명이 있긴 하지만 지역과 큰 상관은 없어요. 텔리체리 후추는 일반 후추보다 알맹이가 큰 후추를 골라낸 것으로 알맹이가 클수록 후추의 풍미가 더 크고 강해 유난히 맛이 좋은 후추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색깔과 향을 가진 후추의 종류


후추의 종류라고 하면 흑후추, 백후추, 적후추 정도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후추는 다양한 종류가 존재해요. 흑후추와 백후추는 사실 가공 방식에 따른 분류입니다. 후추 열매가 익으면 붉거나 노랗게 변하는데 이를 따서 햇빛에 말리면 껍질과 과육이 말라붙어 검게 쪼그라들죠.

흑후추 알맹이를 자세히 살펴보면 쭈글쭈글한 주름이 접혀 있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백후추는 껍질과 과육을 벗긴 후추 씨앗입니다. 쌀로 치면 흑후추가 현미, 백후추가 백미라고 할 수 있죠.

후추의 톡 쏘는 강렬한 맛은 껍질과 과육에서, 은은한 향은 씨앗에서 비롯됩니다. 백후추가 흔히 순하다고 하는 게 이 때문이죠.

적후추는 빨갛게 익은 후추로 오해하기 쉬운데 사실 엄밀하게 따지만 후추 가족은 아닙니다. 핑크페퍼라 불리는 이 열매는 캐슈너트, 옻나무와 같은 가족으로 말려도 색깔이 빨갛고 후추와 비슷한 맛을 낸다고 해 후추처럼 쓰입니다. 빨갛게 익은 진짜 후추를 말리면 검게 변하기 때문에 사실상 산지가 아니고서는 붉은 후추를 보기란 어려운 일이죠.

낯설지만 녹후추도 있습니다. 녹후추는 설익은 녹색의 후추로 만드는데 대개 말리지 않고 소금물이나 식초에 절여 피클처럼 유통되죠. 말린 후추보다 톡 쏘는 맛은 덜하지만 독특한 신맛과 향으로 일부 서양 요리와 동남아시아 요리에 종종 사용됩니다.

이 밖에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형태의 후추도 있습니다. 쿠베브 페퍼는 인도네시아 자바에서 생산되는 후추로 후추처럼 작고 둥글지만 끝에 꼬리가 달려 있는 모양이 특징입니다. 과거 유럽에서도 조미료나 약재로 많이 사용했지만 일설에 따르면 16세기 포르투갈 왕이 인도와의 무역 관계 회복을 위해 자바산 후추 수입을 금지하면서 유럽에서 급격히 사라져 버린 비운의 후추죠. 보통의 후추보다 더 맵고 쓰며 너트메그, 메이스와 비슷한 향을 내 담배와 술, 향수를 만들 때 쓰입니다.

롱 페퍼는 이름 그대로 길쭉하게 생긴 후추입니다. 생긴 건 꼭 말린 무궁화 암술대처럼 생겼는데 후추에는 없는 나무향과 약간의 단맛, 그 후에 찾아오는 강한 매운맛이 특징입니다. 롱 페퍼도 쿠베브 페퍼처럼 과거 유럽에서 종종 쓰인 후추지만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올스파이스를 발견해 들고 오면서부터 인기가 급격하게 줄어드는 불운을 겪었습니다.

요즘 국내외를 막론하고 열정 있는 요리사들은 독특한 후추를 이용해 요리에 다채로운 인상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최근 다양성이 늘어난 소금처럼 언젠가 각양각색의 전 세계 후추를 손쉽게 만나 보게 될 날도 머지않으리라 기대해 봅니다.